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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테헤란로에는 ‘강남헨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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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3. 10. 30. 06:00

조우석 국토지리정보원장
조우석 국토지리정보원장
조우석 국토지리정보원장
'맨해튼헨지'라는 현상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맨해튼의 도로는 동서방향으로 뻗은 스트리트(Street)와 남북방향으로 뻗은 애브뉴(Avenue)가 엮인 격자구조인데 이 중 동서방항인 스트리트의 서쪽 끝에서 정확하게 일몰이 일어나는 때가 되면 맨해튼의 빌딩숲과 함께 석양이 어우러진 장관을 이룬다는 것이다.

필자는 몇 년 전 맨해튼헨지를 보기 위해 관광객이 운집한다는 기사를 통해서 이 용어를 처음 접했지만 봄, 가을 뉴욕을 찾는 관광객들 사이에서는 '뉴욕의 기적'이라고 불리며 꽤나 유명한 모양이었다.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동쪽에서 해가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이다. 오죽하면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을 가리켜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라고 할까. 꼭 맨해튼이 아니라도 동서방향으로 길이 난 곳이라면 서울, 런던, 파리 어디에서나 일년에 두 번은 도로의 끝에서 석양이 지는 자연현상이 일어날 것이란 말이다.

그런데 어쩌다 맨해튼의 일몰에만 특별한 관심이 더해지게 되었을까 하는 호기심이 일었다. 찾아보니 헤이든천문관의 관장인 닐 디그레스 타이슨(Neil deGrasse Tyson)이 2002년에 처음으로 발견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헨지라는 용어는 영국의 유명한 스톤헨지에서 따온 것이다.
어느 도시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이지만 맨해튼을 선택해 이름을 붙인 것은 아마도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이 도시의 매력과 잠재력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한국에서도 맨해튼헨지 같은 현상을 찾을 수 있을까. 맨해튼헨지를 처음으로 명명한 닐 디그레스 타이슨의 발자취를 따라가보기로 했다.

우선 동서방향의 쭉 뻗은 도로가 있으면서 맨해튼에 버금갈만큼 파급력 있는 장소를 고르는 것이 관건이었다. 지도를 펼쳐 여러 도심의 가로형태를 살펴보았다. 상당한 거리를 구불거리지 않고 일직선으로 뻗은 길이어야 했다. 또 지형에 기복이 없고 양 옆으로 석양과 조화를 이루어줄 멋들어진 빌딩숲이 있어야 했다. 이 조건을 모두 가진 곳이 국내에도 여러 곳이겠지만 필자의 눈에 띈 곳은 강남 테헤란로 인근이었다.

필자는 용인에 살며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국토지리정보원은 수원에 있으니 '용인헨지'나 '수원헨지'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이 알고 있으며 앞으로도 찾을 가능성이 높은 곳으로 치자면 단연 강남이 아닐까.

GIS 소프트웨어로 간단하게 계산해보니 테헤란로의 방위각은 대략 63도이다. 3차원 지도로 길이 평평한 것도 미리 확인했다. 다음으로는 서울의 일출·일몰 시간대에 태양의 방위각이 63도에 일치하는 날짜를 찾아야 했다. 태양의 고도와 방위각은 국내외 여러 곳에서 서비스하고 있는데 천문연구원 홈페이지에서도 계산할 수 있다. 올해는 5월 17일과 8월 5일 경에 테헤란로의 삼성역 방향에서 해가 뜨고 1월 1일 경에는 반대방향인 교대역쪽으로 해가 지는 것으로 계산됐다.

일몰 사진을 찍으려면 겨울까지 기다려야 하니 우선 가까운 날에 일출 경관을 확인하기 위해 지난 8월 5일 아침 5시, 길마중1교에 자리를 잡고 삼성역 쪽을 바라보았다. 조깅하는 사람들이 꽤 지나다녔지만 일출에는 관심갖는 이가 없는 것을 보니 아직 '강남헨지'가 유명하지 않은 것은 확실했다.

헨지
필자는 공간정보(지도)의 전문가이기는 하지만 사진찍기에 있어서는 초보이다 보니 인터넷 검색에서 본 것과 같은 작품은 찍지 못했다. 하지만 부족하더라도 나만의 소소한 버킷리스트 완성에는 성공한 셈이어서 이 정도로 만족한다. 이 글을 본 사진실력이 뛰어난 누군가가 테헤란로의 석양을 담아 제대로 된 '강남헨지'를 완성시켜준다면 좋겠다. 혹시 아는가. 몇 년 후에는 서울의 관광 명소로 자리잡아 강남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로 자리잡을지.

태초부터 인간은 자연에 무한한 경외감을 가지고 있으며, 주변의 지형이나 구조물이 자연현상과 어우러져 특별한 조화를 이룰 때 벅찬 감동을 느낀다. 조석의 저조시에 주변보다 높은 해저지형이 노출되는 현상도 과학적으로는 특이할 것이 없지만 성경에서 바다를 가른 모세의 이야기에 빗대 흔히 모세의 기적이라고 불리지 않는가.

자연현상과 구조물을 인위적으로 일치시킨 사례도 있다. 맨해튼헨지의 어원이 된 스톤헨지는 하지의 해돋이와 정확히 일치하도록 정렬되어 감탄을 자아내며, 경주 석굴암은 동짓날 뜨는 태양이 본존불의 이마를 비추도록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이번에 필자가 이름 붙인 강남헨지처럼 처음부터 의도하여 만들어진 것은 아니어도 지형, 구조물, 자연현상이 독특한 관계를 맺는 지점을 찾아낼 수도 있다. 최근에 '보름달을 들고 있는 예수상'을 찍어 유명해진 브라질 작가는 달의 궤적과 예수상의 위치를 고려하여 2년의 준비를 거쳐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것처럼 일상적인 것도 없다. 하지만 이러한 보편성 속에서도 누군가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특별한 이야깃거리를 찾아낸다. 어디에나 있지만 쉽게 찾지 못한다는 점에서 마치 어려서 하던 보물찾기와 닮았다. 그리고 '지도'는 그 보물찾기의 힌트를 무궁무진하게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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