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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석춘 칼럼] “이승만이 정말 민간인 피난 중인 한강 다리를 폭파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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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4. 03. 03. 18:10

이승만 관련 역사 바로잡기 <1>
류석춘
류석춘 전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장
대한민국 독립기념관 관장, 제14대 국회 민주당 비례 의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서울신문 주필 등을 역임한 김삼웅(金三雄)은 2012년 자신의 저서 『독부(獨父) 이승만 평전』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서울을 버린 이승만은....채병덕 참모총장이 북한의 탱크가 서울에 진입하기 전에 유일한 한강 다리인 한강철교를 폭파하라고 최창식 공병감에게 지시하여, 28일 새벽 2시 30분경 국군이 한강철교를 폭파하는 바람에 다리를 건너던 4000여 명의 시민이 현장에서 폭사하거나 물에 빠져 죽고 서울시민들의 피난길을 막아버렸다"(257쪽).

김삼웅의 이 글은 얼마나 사실일까? 놀랍게도 사실과 맞는 것이 거의 없다. 우선, 이승만은 서울을 버린 것이 아니라, 작전상 필요에 따라 후퇴했을 뿐이다. 참모총장에게 지시한 것은 맞지만, 이승만은 폭파의 시간을 특정하지 않았다. 다만 전황을 가장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참모총장에게 북한 탱크를 '한강에서' 저지해야 하니 '적절한 시점'에 필요하면 다리를 폭파하라고 지시한 사실은 있어 보인다.

그러나 탱크가 '서울에 진입하기 전'에 폭파하라고 지시한 사실은 없다. 폭파의 시점이 28일 새벽 2시 30분이 된 것은 참모총장의 판단이었다. 마지막으로, 피난민 4000여 명이 폭사하였다는 말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마음대로 지어낸 말일 뿐이다. 왜냐하면 폭파 순간 다리를 건너던 민간인은 단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경찰병력 76명이 희생되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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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흔히 민간인 희생을 가져온 한강다리 폭파 사진으로 오인되고 있으나, 사실은 1951년 1·4후퇴 당시의 평양 대동강 철교 모습이다. 대동강 철교는 1950년 7월 미 공군에 의해 폭파되었다.
무엇을 근거로 이와 같은 판단을 할 수 있는가? 기록이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남정욱은 2015년 『북한 남침 이후 3일간 이승만 대통령의 행적』이란 책을 출판했다. 이 책 62~65쪽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6월 26일 오전 10시에 개최된 '군사경력자' 즉 군사전문가 회의가 '한강방어선'을 논의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남정욱은 이 회의가 "차후 한강선 방어작전을 수행하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됐다"고 평가한다(65쪽). 이 회의 결과로 대통령이 참모총장에게 필요한 경우 적절한 시점에 한강 다리 폭파를 공병감에게 명령할 권한을 위임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한강 다리 폭파와 관련한 결정적 기록은 또 있다. 2006년에 나온 『인천 1950』이란 번역서다. 이 책에는 매우 귀중한 미국 해병대 사진 하나가 등장한다. 사진을 찬찬히 살피면서 책의 저자가 제시한 사진 설명을 검토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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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출판된 『인천 1950』 12쪽에 등장하는 사진이다. 이 사진은 한강에 있던 철교 중 인천으로 오가는 기차가 다니던 철교의 가운데 지점 용산 측 강변에서 노량진 방향을 바라보고 찍은 사진으로 판단된다.
"인민해방군이 접근해 오는 동안 남한의 피난민들이 한강을 건너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남한의 군 당국이 피난민으로 위장한 파괴공작원들의 활동을 우려하여 피난민의 한강교 사용을 금지시키자, 통나무와 널빤지 등으로 다리의 교각을 따라 부유잔교(浮游棧橋)를 만들었다. 이 부유잔교는 6월 28일에 파괴되었다(출처: 미국 해병대 자료)"(12쪽).

이 사진과 설명은 몇 가지 중요한 함의를 던진다. 우선 사진 설명에서 '부유잔교는 6월 28일 파괴되었다'는 말은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군이 다리를 폭파하자 부유잔교도 같이 파괴되었음을 의미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군 당국이 피난민의 다리 사용을 금지했다는 설명이다. 사진은 다리 상판이나 난간이 파괴된 흔적을 전혀 보여 주지 않는 동시에 다리 위로 인적이 전혀 없음도 확인해 준다.

따라서 이 사진은 다리가 파괴되지 않았을 때 찍은 사진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사진은 군이 다리 위 민간인 통행을 막자, 봇짐을 이고 진 민간인들이 삐뚤빼뚤 엉성하게 만들어진 부유잔교를 따라 한강을 건너고 있음도 보여 주고 있다. 사진을 찍은 시점은 당연히 낮이었다. 다리가 폭파되는 시점인 새벽 2시 반 칠흑 같은 한강에 위험하게 떠 있는 부유잔교로 민간인이 한강을 건너갔을 가능성은 별로 높아 보이지 않는다.

일부에서는 '미국 해병대 자료'라는 사진 설명에 의문을 제기한다. 미 해병대가 6·25전쟁에 실제 투입되는 시점보다 앞서 찍힌 사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6·25전쟁이 나는 순간에도 해병대를 포함한 미국 군사고문단 500명은 한국에 남아있었다. 군사고문단 요원에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해병대 요원이 남아있지 말란 법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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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철이 2014년 출판한 책 『국민은 적이 아니다』 72쪽에 등장하는 임인식의 사진이다. 폭파 직전 상하행선 경인철교 사이에 놓은 부교로 피난민들이 조심스럽게 한강을 건너고 있음을 보여 준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사실이 있다. 이와 같은 해석을 하는 사람이 필자가 처음이 아니란 사실이다. 신기철이 2014년 출판한 책 『국민은 적이 아니다』의 '제2장: 한강철교 폭파, 그 수수께끼를 묻다' 역시 '민간인 희생이 없었고 그에 따라 대통령 이승만의 잘못도 없다'는 결론을 내고 있다. 신기철의 책에는 당시 상황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사진까지도 제시되어 있다. 임인식이 찍은 사진이다 (72쪽). 두 사진의 부유잔교 모습이 동일한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한강 다리 폭파로 희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민간인 희생은 없었지만, 불행히도 다리 위를 지나던 경찰병력 76명이 희생된 사실이 확인된다. 국방부가 1977년 펴낸 『한국전쟁사』 1권 852쪽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종로경찰서는 28일 2시 30분 트럭 여덟 대에 병력을 분승시켜 한강 인도교를 건너던 중 네 대는 무사히 도교(渡橋) 했으나 5번 차량부터는 교량과 함께 폭파되었으니, 이로 말미암아 이상훈 경위 등 76명이 순직."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류석춘 (전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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