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칼럼] 대한민국호의 그레이존 항해법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edu.asiatoday.co.kr/kn/view.php?key=20240523010012461

글자크기

닫기

 

승인 : 2024. 05. 23. 18:23

2024040801000827700047991
정기종 전 카타르 대사
국무조정실이 단국대 분쟁해결 연구센터에 발주한 사회적 갈등으로 인한 경제적 비용분석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2013~2022년 10년간 총 2326조6000억원이 갈등비용으로 소진됐다. 연평균 232조7000억원으로 2023년 명목 국내총생산(GDP)2236조원의 약 10%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유형별로는 이념 갈등이 1981조원으로 노동 307조원에 앞서 최대규모고 계층과 지역 기타 갈등이 뒤를 잇는다. 갈등은 어느 국가에나 있고 일정한 범위 안에서는 견제와 균형의 역할도 한다. 그러나 갈등의 장기화와 확대재생산은 국가공동체에 깊은 균열을 만든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념의 갈등은 정치, 경제 그리고 역사문화적으로 중첩된 것으로 어느 한 가지 요인만을 특정해 이유를 말하기는 어렵다. 갈등은 마치 안갯속에서 방황하는 것처럼 여론을 분열시킨다. 또한 사회를 불안정하게 하면서 국제관계에도 영향을 준다.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는 국가의 대외정책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침략전쟁의 명분으로 삼았다.

러일전쟁 중인 1905년 7월 일본을 방문한 태프트 미국 전쟁부장관에게 가쓰라 일본 총리대신은 조선이 전쟁의 근본 원인이라고 했다. 그리고 전쟁의 귀결은 한반도 문제의 완전한 해결이 되어야 하며 만약 조선을 그대로 두면 분명히 다른 강대국들과 어떤 협정이나 조약을 즉흥적으로 체결하는 이전 습관으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때문에 국제적인 합병증이 재발할 것이라고 강변하면서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의 정당성으로 내세웠다. 조선에 근대적 서구사상이 도입되고 친청파와 친일파 그리고 친러파 간의 알력이 충돌할 당시였다.

그레이존(Grey Zone) 개념은 분쟁지역에 관한 새로운 구별용어다. 일본 방위성의 2010년과 2013년 '방위사업지침'은 국제사회에서 영토, 주권, 경제적 이익을 둘러싼 대립이 고조된 지역, 즉 전쟁으로 확대되지 않은 이른바 회색지대 분쟁이 증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국가의 정책방향이 불분명하다는 의미로 회색을 사용한 것이다. 관련 국가 간의 이익이 경합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그레이존의 전략적 가치는 높지만 그만큼 이들 국가의 외교활동도 공세적이 된다. 주요인사의 방문초청, 연구기금이나 장학금 지급과 장학생 초청, 공동세미나 개최, 친선단체의 활동 지원 그리고 언론기고와 SNS 댓글 달기와 같다. 간접적인 영향력 행사를 위한 노력으로 미국의 정치와 선거에 대한 이스라엘의 로비와 공공외교 활동은 잘 알려져 있다.
우리 외교부는 공공외교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외국 국민들과의 직접적인 소통으로 우리나라의 역사, 전통, 문화, 예술, 가치, 정책, 비전 등에 대한 공감대를 확산하고 신뢰를 확보해 외교관계를 증진하고 우리의 국가이미지와 국가브랜드를 높여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제고하는 외교활동이다. 문화·예술, 원조, 지식, 언어, 미디어, 홍보 등 다양한 기제를 활용해 외국 대중에게 직접 다가가 그들의 마음을 사고 감동을 줘 긍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나간다는 것이 기본 콘셉트다. 이 같은 활동은 국내에 주재하는 외국공관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이러한 공공외교에 적합한 토양을 가진 국가다. 정이 많고 외국인에게 친절한 국민성과 역사적으로 주변 국가들과 축적된 정치, 경제, 문화적 연계성이 있어서다.

공공외교의 본래 취지는 국가 간의 문화교류를 통한 친선과 이해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냉전 시기에는 진영화 편제를 위한 목적으로 안토니오 그람시의 표현처럼 물이 스며들 듯이 자연스럽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헤게모니 취득 활동과 유사하게 된다. 가치의 주창이 이념과 연계되기 때문이다. 남북한 간의 대결이 고조된 상황에서는 북한이 간접적인 방법으로 국내의 내부갈등을 조성할 가능성도 있다. 허위정보의 제공과 확산 그리고 선동으로 여론의 분열과 국력소진을 유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국내외적 환경은 국내 오피니언 리더와 온라인 인플루언서의 역할을 주목하게 한다. 갈등을 부추기거나 낮추는 나비효과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레몽 아롱이 말한 지식인의 아편처럼 독선적인 정치신념이나 사적인 이익추구는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위태롭게 만든다. 따라서 국익을 최우선으로 해야 하며 전달하는 사실과 사용하는 단어는 정직하고 정확해야 한다.

그리고 선동적인 노이즈 마케팅이 되어서는 안 된다. 뉴스와 SNS가 수익 창출의 사업 수단으로 발달한 현대사회에는 이러한 경향이 심해질 수 있다.

19세기 독일 통일의 주역 비스마르크는 모든 국가는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을 타고 항해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숙련된 경험으로만 방향을 잡아갈 수 있다고 했다. 거대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각각의 역량이 합력하지 못하고 분산되거나 충돌하는 것은 항해를 실패로 이끈다. 격랑의 바다에서 안갯속을 항해하는 배를 탄 사람들은 선장과 선원을 비롯해 탑승한 모두가 공동운명체다. 따라서 배의 안전과 항해를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한다. 더구나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정부 외에 민간부문의 전략적 사고와 역량이 중요하다. 여론을 형성하고 선거 결과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전략적 사고는 바둑이나 체스에서처럼 냉철하게 수를 읽는 계산이며 역량은 전달받은 정보와 제공자에 대한 맹신이 아닌 합리적인 검증능력이다.

대한민국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단기간의 압축발전 과정을 겪었다. 이 때문에 국제조류의 격랑을 헤쳐나갈 만큼 숙련된 경험을 가질만한 충분한 여건을 갖추기 어려웠다.

더구나 한국전쟁과 남북대결은 사상이나 이념에 대한 증오와 거부감을 만들어 국민이 면역력을 기를 여지가 없었다. 단순한 암기위주 교육과 선택형 시험에 익숙해졌으며 건강한 토론문화의 부재로 공동의 이익과 화합의 방법을 찾는 학습이 부족했다. 그리고 논쟁에서 개념의 정의와 용어의 정확성을 찾기보다 감정적인 충돌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대한민국호가 갈등과 분열로 내우외환의 위기를 맞지 않도록 국민의 전략적 사고와 역량이 요구되는 시기다. 여기에는 정부 그리고 오피니언 리더와 인플루언서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정기종 (전 카타르 대사)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